-
아이스테시스 - 여전히 유효한 예술의 현재Archive/밑줄 긋기 2011. 9. 18. 15:30
아이스테시스발터벤야민과사유하는미학 카테고리 지은이 상세보기
전 세계적으로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jamin)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나 뿐인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10여년 전 반성완 선생이 번역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뭣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 이후로 벤야민에 대한 책들이 서점에서 심심치 않게 보였고, 그 중 몇 권은 내 서가에도 꽂혀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벤야민은 '어렵다'. 번역된 글을 읽어야 하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미 그의 글쓰기 방식 자체가 난해함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또 다시 벤야민에 대한 책을 손에 넣었다. 강수미 선생이 펴낸 『아이스테시스』가 바로 그것인데, 벤야민의 사유의 지도를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제법 두툼하기도 하거니와, 벤야민의 사유를 이해하는 일은 역시나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략적이나마 그의 사유의 핵심을 얼핏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유독 내 눈길을 끈 구절이 있어 이렇게 옮겨두고자 한다. 벤야민 당시의 시대적 상황, 특히 테크놀로지와 시대가 맺고 있는 불가분의 관계를 깊게 들여다 본 벤야민의 사유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벤야민에게 있어 현대는 테크놀로지의 시대였다. 테크놀로지를 제2의 자연이라고 부를 만큼 그는 현대를 테크놀로지와 불가분의 관계로 보았다. 테크놀로지가 제2의 자연이라는 말은 곧 인간의 삶이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최초의 인류가 당면한 문제가 자연에서의 생존이었다면, 이제 인간은 테크놀로지 안에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했다. 벤야민은 현대의 인류가 처한 상황을 일종의 위기 상황으로 여기는데, 그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테크놀로지이다. 테크놀로지는 인간 사회의 모든 분야의 변화 속도를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변화시켰다. 벤야민은 테크놀로지로 인하여 인간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상품화 되게 되었으며, 인간은 변화의 속도와 자신을 사로잡는 스펙타클 속에서 스스로를 오히려 퇴행시켰다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벤야민이 테크놀로지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테크놀로지를 중립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가 이를 제2의 자연이라고 일컬은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연은 인간 삶의 배경으로 가치중립적인 것이며,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대하는 것인지가 가치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어느 쪽이든 똑같은 산업기술이지만, 관건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어떤 이미지 상상력으로 그 신기술과 조응하는가이다. 바야흐로 산업기술이 급속한 속도로 발전해가던 19세기 당시, 사람들은 그 기술을 자연의 지배와 신화의 예속 상태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 계층으로서 부르주아지를 위한 자본 축적과 소비에 전용했다. p.163
벤야민의 이와 같은 분석이 흥미로운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 까지 유효하다는 점이다. 이미 20세기 초에 테크놀로지와 이에 따른 문제점을 분석해내고, 이에 따른 반성의 기회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더 빨라진 속도에 적응하는 것이 우리의 제1과제가 되어 버렸음은 물론이거니와 최신식의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아등바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벤야민이 통찰한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심화시키는 역사적 오류를 범해왔다고 할 수 있다.
벤야민은 테크놀로지의 문제가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이미 간파하였다. 또한 그는 사진과 영화를 테크놀로지에 의거한 새로운 예술의 형태로 보았으며, 이를 통해 현실의 변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차적 의미의 저변에 깔린 더 중요한 내용은, 사진과 영화에서는 전통적인 예술의 "예술적 기능"이 아니라, 예술의 새로운 "사회적 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이러한 복제기술과 영화에 의해 테크놀로지로 변화한 제2자연의 사회, 또 바야흐로 대중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집단적인 이미지의 생산과 수용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이다. 예술 영역에서 이는 구체적으로 "예술가가 대중에 영향을 미치고, 역으로 대중이 예술가에게 반응하는 과정이 거부할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법칙"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 긴밀한 피드백 과정에서 사진과 영화가 수행할 수 있는, 정확히 말하면 벤야민이 '기대한' 사회적 기능은 '현실 사회를 변혁하는 정치적 실천의 매개체' 역할이다. p.243
테크놀로지를 통한 예술이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벤야민의 믿음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테크놀로지는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제2자연"의 지위를 지닌다. 말하자면 이제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의 지위를 지니게 된 것이다. 즉, 벤야민이 보기에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삶 곳곳에 침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의 사유와 지각의 방식마저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본다. 요컨대 테크놀로지는 "동시대적 지각과 경험 조건"을 제공하게 되기 때문에 이를 통한 예술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잊혀진 이상과 진리의 복원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예술의 이러한 긍적적 가능성은 21세기의 우리들, 더 좁게는 예술을 업으로 삼은 동시대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한편 이러한 그의 주장이 지닌 맹점 또한 인식하도록 한다. 20세기를 통틀어 테크놀로지는 사진과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의 조형 언어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그의 바람처럼 이러한 예술작품들은 시대적 과제를 더욱 생생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놀로지를 통한 예술이 현실을 변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앞서 보았듯 테크놀로지는 현실 변혁의 역할 보다는 지배 계급의 힘을 공고히 하는 것에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여전히 그러한 현상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찌 보면 무척 간단하다. 벤야민 자신도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테크놀로지는 태생적으로 지배 계층에게 거의 독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권력의 소유는 곧 자본의 소유와 동일시 될 수밖에 없으며, 자본의 소유는 곧 테크놀로지의 소유와 직결된다. 특히, 그러한 자본에 의해 테크놀로지는 발전을 거듭하며, 그렇게 발전된 테크놀로지는 다시 지배 계층의 독과점을 강화시키게 된다. 현실의 상황을 들여다보자. 카메라가 아무리 일상적인 제품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카메라의 소유는 자본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사진 작가들은 여전히 장비와 그 장비에 필요한 또다른 재료들을 구매하기 위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경우가 다반수이다. 물론 일회용 자동카메라나 값싼 장비들을 통한 예술작품의 제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분명 예술작품이 고가의 테크놀로지로를 이용한 장치로만 가능한 시대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놀로지를 통한 예술이 우리의 사회를 변혁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것도 사실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접근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예술 또한 하나의 상품으로 자본주의에 묶여 있는 한 예술의 힘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어찌되었든 벤야민의 현대에 대한 사유의 깊이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성찰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분석한 당시의 문제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불씨 또한 그의 사유 속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사유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도 요구된다 할 것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예술의 역할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사유가 보다 진지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