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김규식 VS 윌리엄 레이븐(William Laven) : 표절에 관한 시시비비 - 이영준 외
    Archive/논문과 기사 2009. 11. 25. 02:39


    작성자 : 이영준 2009.01.15
    <김규식이 레이븐을 표절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김규식이 윌리엄 레이븐의 사진을 표절했다는 혐의에 대해서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김규식이 아이디어가 빈곤한데 전시는 해야겠고,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해서 꼼수를 내서 윌리엄 레이븐의 사진을 앞뒤 가리지 않고 그대로 베꼈다. 이 경우 김규식이 그렇게 미련하고 멍청하냐가 문제가 된다.

    2. 김규식은 윌리엄 레이븐의 사진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우연의 일치로 대상이 비슷했다. 이 경우 이미지로 포화가 된 이 세상이 문제다.

    3. 김규식이 윌리엄 레이븐의 사진을 보고 나도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다르게 해석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작업을 했는데 사람들이 표절이라고 몰아부친다. 이 경우 이미지가 얼핏 보아 비슷하기만 하면 자세히 들여다 보지도 않고 표절이라고 몰아 부치는 다른 작가/관객이 문제다.

    지금 눈 앞의 문제는 과연 어떤 경우에 해당할까. 사진전시 도록 서문에 의례히 등장하는 말들 중 하나가 요즘의 문화상황은 보드리야르(보들리야르가 아니다)가 말한 시뮬라크라로 가득 차 있어서 원본 없는 이미지들이 판을 치고 있으며, 실제와 거짓의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은 오늘날의 사진가들이 찍고 있는 대상은 다른 사진이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는 피사체 자체 만을 찍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에 덧씌워져 있는 의미와 해석의 층위들을 같이 찍게 되는데, 이런 층위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피사체를 고르면 그 층위도 한 패키지로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라면을 사면서 그 안에 들은 스프를 안 살 수 없듯이, 누군가 여러 다른 공장을 같은 앵글로 많이 찍으면 자동으로 ‘베혀’, 뭔가가 빠글빠글하게 섞여 있는 스펙터클을 대형카메라로 찍으면 ‘구르스키’가 되는 것이다.

    요즘 같이 이미지가 포화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 어떤 대상을 찍고 난 후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 이미 찍었더라 하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 하는 차용은 사실은 전략이 아니라 양상이다. 21세기에 이미지들이 존재하는 양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양상은 점점 더 치밀하고 조밀해져 가고 있다. 그러니까 차용을 피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오리지널리티가 설 땅은 점점 좁아지는 것이다. 비슷한 이미지들이 많아지니까 표절의 정의도 점점 좁아진다. 즉, 사진의 외양이 적당히 봐서 비슷하다고 표절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담벼락 앞에 바싹 세워 놓고 찍으면 워커 에반스의 표절이고, 여자를 홀딱 벗겨놓고 민망한 포즈로 찍으면 아라끼의 표절이고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절의 문제는 단순한 유사성으로는 얘기할 수 없다. 표절이 성립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1. 표절 당하는 이미지와 표절하는 이미지가 완전히 똑같아서 원작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경우. 이미지의 도상적 구조가 같은 경우 표절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의 대표적인 경우는 70년대에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조각으로 상 받은 작품이 일본 광고사진의 모델의 포즈를 그대로 베낀 것과 같은 경우이다.

    2. 베꼈거나 일부 차용했는데 원작 보다 못한 경우. 위의 경우도 빵떡모자 쓴 그 조각가 선생님의 작품이 원래의 사진 이미지보다 후졌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즉 조각가의 아이디어 빈곤이 훤히 보이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이 찍은 것과 같은 피사체를 찍었는데 원작보다 낫거나 아니면 해석이 확연히 다른 경우 표절이라 할 수 없다. 안셀 애담스가 찍은 하프돔을 같은 각도에서 나도 찍었는데 내 사진이 더 낫거나 해석이 확연히 다르면 표절이 아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주명덕이 찍은 송광사의 절방인데, 이 방은 주명덕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임응식이 먼저 찍은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주명덕이 임응식과 같은 방을 찍었다고 표절이라 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주명덕의 사진은 임응식의 사진에 대한 오마주이며, 사진의 분위기가 살짝 다른데, 특히 주명덕은 절방의 장판지 위에 번들거리며 반사되는 광선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은 두 사진은 같은 방을 찍었지만 완전히 다른 사진이다.

    김규식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떤 분이 윌리엄 레이븐과 김규식의 사진이 내적 의도나 외적 결과물이나 똑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우선, 우리가 다른 인간의 뇌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볼 수는 없기 때문에 내적 의도란 아예 알 수 없으므로 논외로 치고 (요즘 동시대 예술논의에서 작가의 의도란 말 아예 쓰지 않는다), 외적 결과물은 완전히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규식과 레이븐은 서로 다른 대상을 찍었다. 레이븐이 항공기의 부품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찍었다면 김규식은 그 부분을 확대해서 찍었다. 그는 폭탄이나 보조연료탱크 등을 확대해서 찍었다. 레이븐의 사진에서는 모형 항공기의 모든 부품 전체가 러너(runner)에 붙어 있는 것을 찍었지만 김규식은 사진의 프레임을 통해 러너를 끊어 놓아, 회로로 보고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레이븐은 제목 자체도 항공기의 기종이다. B1 Lancer, C130 Hercules 하는 식이다. 그는 B1 Lancer를 이루는 부품 전체가 해부학적으로 회로상에 배치되어 있는 그 양상을 찍고 있다. 반면 김규식의 사진제목은 부품들의 이름이다. GBU-31 JDAM, LAU-3 하는 식이다. 물론 레이븐이 찍은 기종과 김규식이 찍은 기종이 기종이 겹치는 것도 있으나 아주 제한적이고 (F117 Nighthawk 단 한 경우), 두 작가는 모형 항공기를 다루는 레벨이 완전히 다르다. 레이븐이 나이트호크의 부품 전체를 하나의 회로도 처럼 찍었다면 김규식은 그 항공기의 동체 상판만 찍었다. 그리고 김규식이 찍은 GBU-31 JDAM은 F15, F16, A6, AV8 등 여러 기종에서 운용가능한 것이므로 레이븐의 사진과는 다른 레벨에서 겹치고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같은 나무를 찍었어도 전체를 찍은 것과 가지의 부분을 찍은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일단 피사체만 놓고 봤을 때, 김규식이 레이븐이 찍은 것과 같은 대상을 찍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시력이 아주 나쁜 분들이다. 사진의 가장 기본적인 차원인 피사체가 다르기 때문에 더 이상 표절을 얘기할 건덕지 조차 없지만 그래도 물고 늘어질 분들의 의혹을 말끔히 해소해 드리기 위해 얘기를 더 해보자.

    그 다음은 해석의 문제이다. 레이븐의 해석과 김규식의 해석은 안드로메다 성운 만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물론 나는 김규식의 사진은 전시된 상태로, 그러니까 그 사진이 보여지도록 의도된 그 맥락에서 보았고, 레이븐의 사진은 인터넷에 올라온 작은 이미지로만 보았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나 분석은 불가능하다. 레이븐의 사진을 실제로 보았다면 더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현재 본 상태로만 판단해 보자.

    이미 다른 분들이 밝혔듯이 레이븐은 걸프전에 동원된 군용기들을 일별하기 위해 플라스틱 모델을 찍었다. 레이븐은 모형 항공기의 해부학적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김규식은 부품들이 거대하게 뻥튀기되어 괴물처럼 다가오는 물신화된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둘은 확연히 다르다. 레이븐의 조명은 모형 항공기의 부품들의 입체감을 살리도록 찍었고, 김규식은 부품들이 평면적으로 보이는 광선을 사용했다. 즉 레이븐의 사진은 모델을 입체감을 가진 물질의 체계로 보았고, 김규식은 작은 부품이 플랫한 광선 속에 사물성이 탈각된 채 괴물 같으면서 기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이미지로 다가오는 언캐니한 면을 찍은 점이 크게 다르다. 레이븐이 플라스틱 부품들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김규식은 그것을 벗겨 버리고 있는데, 이는 디테일의 차이지만 사실은 큰 차이이다. 김규식이 레이븐의 사진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 차이를 잘 관찰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주 기본적인 얘기지만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사진에서는 피사체가 같아도 빛이 다르면 다른 사진이다. 레이븐의 빛과 김규식의 빛은 서로 안드로메다 성운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레이븐의 사진에서는 항공기들이 흡사 항공기 제작사의 생산라인에 배치되어 있듯이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고, 그는 항공기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시스템은 공장이나 설계도의 시스템이 아니라 플라스틱 모델의 시스템이다. 어린 학생이 몇 달을 모은 돈을 과학교재사에 들고 가서 사와서는 집에 오기가 무섭게 옷도 안 벗고 상자를 열어 러너에 붙어 있는 부품들을 일단 쫘악 하고 훑어 볼 때의 그 쾌감을 가져다 주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작은 시스템을 손 안에 쥐고 있다는 쾌감이다. 레이븐의 사진의 역설은 그 시스템을 실제로 쥐고 있는 것은 어린 학생이 아니라 그런 무기들을 운용하는 군사전략가와 정치가들이라는 사실에 있다. 러너에 일괄적으로 붙어 있는 각각의 부품들은 하나의 회로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전쟁의 회로이기도 하다.

    반면 김규식은 개별 사물들이 눈 앞에 확 하고 크게 다가오는 그 징그러운 양상을 찍고 있다. 나 같이 어릴 적에 플라스틱 모델을 만들면서 항공기와 기계에 대한 로망을 키워온 사람들에게는 그의 사진은 어릴 적 꿈에 대한 기묘한 재해석으로 다가온다. 반면 그런 점은 레이븐의 사진에는 없다.

    이제 다시 요약해 보자. 세 가지 이유로 해서 김규식이 레이븐의 사진을 표절했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1. 김규식과 레이븐의 사진은 피사체가 다르다. (F16과 GBU-31은 다른 물건이다)
    2. 김규식과 레이븐의 사진은 사물의 존재양상이 다르다. (시스템 vs. 물신화된 개별사물)
    3. 김규식과 레이븐의 사진은 광선이 다르다. (입체적 vs. 평면적)

    이영준 <기계비평가>

     

     

    작성자 : 허접 2009.01.16
    <이영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먼저 가명으로 글쓰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영준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쾌도난마식의 명문장을 읽으며 가슴이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글때문은 아니고요. 아마도 현대미술, 아니 복잡다기한 현대의 속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혹시 민병헌같은 희뿌연 사진, 배병우같은 소나무사진, 주명덕같은 시꺼먼 숲사진, 방병상같은 스트로보 쳐서 찍은 여자사진, 스기모도같은 바다사진, 제프 월같은 사진, 구르스키같은 사진들을 바라보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그 수많은 `아류` 사진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결국 작가의 생각(컨셉, 철학, 아이디어, 말주변)만이 차이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일까요? 만일 김규식님과 레이븐의 차이는 작품 그자체가 아니라 혹시 미술평론가들이나 화랑이나 큐레이터같은 쪽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요즘 염치 체면 볼것없이 눈치 빠르고 머리만 잘 굴리면 금새 일류작가 반열에 오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작품값도 엄청 비싸다면서요.)

    선생님께서는
    "1. 김규식과 레이븐의 사진은 피사체가 다르다. (F16과 GBU-31은 다른 물건이다)
     2. 김규식과 레이븐의 사진은 사물의 존재양상이 다르다. (시스템 vs. 물신화된 개별사물)
     3. 김규식과 레이븐의 사진은 광선이 다르다. (입체적 vs. 평면적)"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찍을때) 존재론적으로나 현상학적으로 같은 사진이란 이 세상에 단 한장도 존재할수 없는것이 아닐까요?

    세상엔 같은것도 없고 다른것도 없다..... 옛날의 안정된 예술이론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평론가의 친절한 설명이나 해설없이는 현대의 예술작품을 이해할수 없게된 것같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명쾌한 말씀을 들어도 저는 계속 속이 답답한겁니다. 선생님처럼 논리정연하게 생각을 정리해서 말할수 있었으면 좋을텐데 공부도 부족하고 그런 재주도 없어서 혹시 오해받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작성자 : 이영준 2009.01.16
    <차이와 같음>

    우선 ‘같다‘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해야 할 것 같군요. 원론적으로 이 세상에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대략 훑어보면 같아 보여도 속으로 들어가서 디테일을 보면 다르지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원소는 ‘차이’입니다. 물리학자나 화학자들이 원자나 전자를 말 할 때 기본이 되는 것은 그것들이 차이와 분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질들이 아무 차이 없이 다 동질한 상태로 있으면 어떤 원자고 전자고 아예 존재할 수 없겠지요. 그러면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통반죽 같이 그냥 한 가지 물질로만 된 미분화의 상태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부턴가 우주에는 분화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수 많은 차이들이 생성됩니다. 그게 분자건 원자건 사람이건 음식이건 기업이건 나라이름이건 단어이건 말입니다.

    그렇다면 ‘같다는 것’은 어떻게 존재하느냐. 그것은 사람이 보기에 같다는 것입니다. 그 전제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시력이 썩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력이 썩 좋지 않으니까 아주 미세한 차이들은 잘 보이지 않고 대략의 큰 형태만 보이니까 같은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눈이 안 좋은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멧비둘기와 집비둘기를 구별 못하겠지요. 저는 눈이 아주 좋아서 고속도로에 운전하면서도 휙 하고 지나가는 비둘기가 멧비둘기인지 집비둘기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력으로 구분이 안 되면 같은 것, 구분이 되면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력이란 무엇이냐. 시력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공식적인 구분은 아니고 제가 자의적으로 내리는 구분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시력검사 할 때 나오는 1.0 하는 식의 생리적인 시력입니다. 그 다음은 문화적 시력입니다. 어떤 물체를 어떤 식으로 식별하느냐 하는 시력입니다. 옛날에 저 어렸을 적에는 시계 소매치기가 많았는데 그들은 700미터 밖에서도 롤렉스 시계를 알아본다고 합니다. 문화적 시력은 여러 가지 논의와 담론들을 통해 변화되고 보강되기도 하며 탈락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대단히 변화무쌍하다는 것입니다.

    사진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진들은 물리적으로 다 다릅니다. 심지어 카메라를 삼각대에 단단히 묶어 놓고 같은 조건에서 셔터만 계속 눌러서 나오는 사진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 차이를 인지하려면 분자수준으로 내려가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눈은 분자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시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같다’라고 판단하는 거지요. 여기서 앞서 말한 문화적 시력의 개념이 들어옵니다. 저의 학생이 민물고기를 귀신 같이 구별하여 사진 찍은 친구가 있는데 제 눈에는 다 똑같은 매운탕 재료로만 보이더군요. 그러니까 저에게는 민물고기를 알아보는 문화적 시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물과 지식의 범주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전문적인 분과학문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전문적인 분과학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떤 논거가 참인지 거짓인지 항상 비판의 눈이 번뜩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판의 힘에 의해 계속해서 오류를 씻어내고 새로운 논거를 들이대어 엎치락 뒤치락 하는 대단히 변증법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이야말로 학문의 가장 기본이고 과학을 발전시켜온 원동력이지만 한국에서는 상당히 결여되어 있지요. 같은 이치로, 표절에 대한 모든 논의에는 표절이라고 판단하는 잣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비판적인 논거가 항상 따라다녀야 합니다. 결국 따져야 할 것은,

    1. 누구의 사진과 누구의 사진이 같다고 할 때 같다는 전제조건이 무엇인가, 즉 어떤 종류의 시력과 어떤 거리를 전제하고 있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만일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이 자신의 눈으로 구분이 안 된다고 어떤 두 가지 사항이 같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오류입니다. 패션스타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저는 그에 대해 구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 누구나 시력의 한계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시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확장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학교, 미술관, 갤러리 같은 제도들이 어떤 식으로 시력을 확장하고 섬세화하는 교육과 담론을 만들어내고 실천하고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대한민국의 대학교 사진학과 중 어떤 곳이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 실천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뮤지엄이나 갤러리는... 글쎄요... 금방 대답하기 힘들죠. 사실은 대답하기도 싫죠.

    이제는 차이를 얘기하야 할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원론적인 차이는 논외로 하고, 실제로 작가나 평론가들 사이에 문제가 되는 그 차이들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당연히 우선 작가가 만들겠지요. 그리고 작가가 인간이라면, 모든 인간은 다르게 태어났기 때문에 (법 앞에 평등한 거 빼고) 인간인 작가가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다 다르지요. 그래서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같음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 차이들에 (자신의 시력에 따라) 레벨을 부여하고 카테고리로 묶습니다. 그게 사조일 수도 있고 학파일 수도 있고 잘 어울리는 사람들의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유사성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비판적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내세우는 차이로 인식해야 할 것을 같음으로 인식해 버리고서는 같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작가에게는 억울하게도, 작품이 아무개와 완전히 다른 데 다른 사람들의 시력이 약해서 같은 것으로 치부돼 버립니다. 이때 작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평론가입니다. 그가 세세한 차이를 설명해줘야지요. 그리고 평론가가 나서서 작품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절대로 작가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작가는 홀로 찬 대지에 서서 운명의 폭풍과 맞대결하는 고고하고 멋진 존재 같지만 사실은 주위에 평론가, 딜러, 기자, 출판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CEO같은 존재입니다. 피카소도 그랬고 허스트도 그렇고 바니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그런 주위 분들과의 공동작업입니다. 다만, 여러 가지 이유로 크레딧은 작가에게 몰아주는 거지요. 영화에서 궁극적인 크레딧이 감독과 주연배우에게 돌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리하자면, 차이는 어느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만드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빠트리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은 유동적인 과정 속에 있는 것이지 한 번의 절차로 모든 것이 결정돼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같음 ---> 다름” 이렇게 한번만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같음 ---> 다름 ---> 같음’ ---> 다름’ ---> 같음‘’ ---> 다름‘’ ---> 같음‘’’” 이렇게 끊임 없이 전환이 일어나는 생성의 과정입니다. 평론가나 큐레이터나 딜러가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해서 멋쩍어 할 필요는 없고, 그것이 어떤 역동적인 과정 속에 들어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평론가가 아무개의 사진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했으면 그 해석의 빛을 쪼인 그 작품에는 어떤 변화와 변질이 일어나는가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결국 표절의 문제는 같고 다른 것을 판별하는 시력의 문제다라고 했을 때 공은 작가에게 넘어옵니다. 문제는 제가 표절에 대한 정의에서 두 번째 말 한 조건, 즉 베꼈는데 똑같거나 후지게 베꼈으면 표절이고 다르거나 낫게 베꼈으면 표절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지난 몇 십 년간 한국사회에 표절에 대한 논란이 참 많았지요. 그런데 그 논의의 속을 까보면 거기에는 표절이라고 의심을 받는 작업들의 질이 문제가 됩니다. 신통치 않으니까 표절이라고 욕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절 얘기하려면 한국의 시각예술품의 질이 과연 어떤가 하는 얘기를 해야 합니다. 딴 건 몰라도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중들이 찬양하는 작가들에 대해서 작가나 평론가들끼리는 인정하지 않고 있죠. 그것은 일정하게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반열에 오른 예술적 질이 아직 확보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욕을 먹던 칭찬을 듣던 말이죠.

    김규식의 경우, 그가 찍은 사진이 레이븐의 사진과 얼마나 같은가를 따지는 것이 뭐 잘못된 일은 아닐 수 있으나, 그런 논의는 예술적 질의 문제를 수반해야 합니다. 여기서 질이라고 하니 반드시 레벨의 높고 낮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질이란 꼭 높은 질과 낮은 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평면에서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양한 질의 종류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사진에서는 말도 안 되는 질을 가진 사진이 예술사진에서는 통하는 것도 있고(미항공우주국 사진의 질은 과학적 정보의 질입니다.), 예술사진에서는 통하지만 지리정보로는 쓸 수 없는 사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질의 문제는 사진이 차지하고 있는 전략적 지점과 지향하고 있는 방향성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김규식의 사진에서 질의 문제를 따진다고 했을 때 그는 이 사진들을 통해 플라스틱 모델을 어떤 자리에서 보여주고 있는가, 그것이 과학인가 오락인가 예술인가 개인적 기억인가를 따져야 할 것이고, 모델이 대표하는 항공기에 대해 어떤 지식을 구성하고 있는가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즘 눈치 빠르고 머리 잘 굴려서 금세 일류작가가 된 사람이 있다고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는 한국에 그런 작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일류작가는 눈치와 잔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술이란 전존재의 문제입니다. 몸과 마음과 버릇과 감각과 주변의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상의 레벨과 다른 레벨로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 예술인데 그런 근본적이고 급격한 변화는 눈치나 잔머리로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눈치나 잔머리로 내일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각도를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해의 각도를 결정하는 것은 우주라는 전존재가 하는 것입니다. 예술도 인간이라는 전존재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어떤 약삭 빠른 친구가 잔머리 굴려서 묘한 이미지 만들고 말 좀 잘 해서 화랑에 잘 팔아먹었다고 그게 일류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성자 : 관람객 2009. 01. 16
    <표절? .. 그런 주장은 충분히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저는 선생님의 불성실한 팬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 글은 선생님의 맨 윗글 <김규식이 레이븐을 표절했다는 주장에 대하여>에 대한 답글입니다.

    1. 광선 얘기에 대하여.

    - ` 윌리엄 레이븐은 입체감을 살리도록 광선을 만들었고, 김규식은 평면감을 살렸다.` 는 선생님 말씀에 대하여 답변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면, 선생님도 레이븐의 오리지널 프린트를 보지 않으셨어요. 따라서 선생님 원문 맨 마지막 확정적인 조건 성립들은 너무 오버입니다. 선생님도 글 중간에 레이븐을 보지못한 것애 대한 불확실함을 인정해놓으셧는데, 글 마지막에 누가 보기에도 명백한 결론들을 내어버리는건, 물론 선생님 글 중간의 말씀대로 추측이나 심증은 가능합니다. 평론 생활 오랫동안 해보셨기 때문에 아시겠죠. 웹상의 jpg이미지와 실제프린트가 차이가 많이 납니다. 예컨데 39조 2항에서의 이용훈씨 프린트를 놓고 보면 이해가 될겁니다 웹상에서의 느낌과 실제프린트의 느낌은 천지차이였거든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진 전시 준비해보면, 이런 문제들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게시판에서 한심하게 떠들고 있는 사진들은 현대 이미지들의 질주에 등장하는 신문 속 보도사진들을 놓고 표절이다를 놓고 따지는게 아니잖아요. 명백하게 갤러리에 걸릴 예술사진들입니다. 에디션이 있고, 단돈 500원에 팔리는 신문에있는 사진들이 아니잖아요. 비싼 액자에 하나에 몇십만원짜리 토너를 쓰는 비싼 잉크젯으로 적어도 몇백이상은 받고 작품을 팔고 싶어하는 놈들일거라구요. 태생이 오리지널 프린트로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 놈들입니다. 보세요. 김규식 작가와 레이븐 작가 웹상의 이미지를 보세요. 그 아래에 텍스트 딱지 붙여놓고 자기네는 특별한 놈들이라고 광고하지 않습니까? 몇백년은 지속되는 최고급 잉크젯만 사용한 이미지이니까  웹상으로는 쉽게, 보지 말라고.

    저도 아트선재에서 김규식 작가의 작품은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도 레이븐의 사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선생님도 똑같은 평범한 관객들처럼 웹상의 이미지로만 판독하고 얘기하여야 해요. 레이븐의 오리지널 프린트를 보지 못했으니까요. 이에 대해 선생님도 조심스럽게, 글 마지막에는 "이런게 아닐까?" 라고 끝맺음 한다면, 수긍이 갈거에요.하지만, 선생님 글의 마지막을 보세요. 너무 무섭게 엄포식의 문장을 올려놔 버리셨어요.

    자 그렇다면 웹상의 이미지로만 보고 이야기를 해볼게요. 선생님은 윌리엄 레이븐은 입체감을 지녔고, 김규식은 평면감을 지녔다고 했어요.
    http://a39c2.files.wordpress.com/2008/12/01.jpg <- 김규식작가의 웹이미지입니다.
    다른 이미지들을 놓고 볼때도, 김규식의 이미지는 절대 평면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흑백의 존시스템 효과를 살리기 위하여, 은근히 입체감을 강조한 흔적이있어요. 그럼 윌리엄 레이븐의 이미지는 입체적이냐? 그렇지도않아요. 오히려 웹상으로만 놓고보면 윌리엄 레이븐의 이미지가 더 평면적으로 보입니다. 혹시 제 눈이 이상하다면, 이영준선생님말고 다른 분들도 지적해주길 바랍니다. 단순히 광선의 차이만으로 선생님은 작가의 심오한 의도까지도 때려 맞추려고하고있어요. 선생님의 현대 예술론의 논리와는 다르게, 어떻게 광선하나만으로,  작가가 마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제작한것처럼 말씀하는 자신감이 가능한지 묻고 싶어요. 소설가가 아니라면 말이죠. 궁금합니다.

    -> 절대로, 광선의 다름으로 위 두 작가의 사진을 설명해낼 수 없습니다.

    2. 사물의 존재 양상이 다르다?

    선생님은 김규식과 레이븐의 사진 안의 사물의 존재 양상이 다르다고 하였는데요. 조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김현호 전시 기획자가 이야기했던 것. -> 김규식 작가는 어린 아해들이 맨날 문방구에서 돈탈탈 털어 `이뻐하고 사랑해주는` 장난감들이 전쟁에 쓰이는 도구와 이미지들이었다는 것, 그런 기계들이 주는 매혹적이고 탐미적인 아름다움에 빠져있는 어떤 인간의 감성들에 대해 아주 탐미적,집중적으로 접근하였다고 적었어요. 이는 즉, 현실의 아이러니, 즉 시스템의 문제로 확대해석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그런 상황을 만들어가는 주체가 무엇인지 고민해볼수 있다는 점이에요. 왜 문방구에 가면 온갖 전쟁이미지들의 장난감이 있는지, 그 이유가, 아이들이 단지 선호해서그런건지, 그냥 징그럽게 좋아해서 그러는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 배후에 있는것인지 따져볼 여지를 준다는 거죠. 근데 선생님은 그 반대로 윌리엄 레이븐의 사진을 이야기할때 위와 비슷한 언급을 하였어요. 묘하죠...

    선생님이 말한 레이븐의 시스템과 김규식의 양상.

    언뜻 보기에는 레이븐은 선생님 말씀처럼 비행기 조립 시스템 부품들을 그대로 편집해놓은것 같아요. 하지만 아닙니다. 비행기 내부의 부품들이 몇만개가 넘습니다. 저렇게 레이븐의 작품처럼 심플하게 떨어지질 않아요. 저걸 보고 비행기의 시스템이다... 전쟁산업의 시스템에 대한 접근이다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정말 비행기 기술자가 보면 `귀여워서` 웃을겁니다..."그래도 얼추 잘 표현은 했네" 이러죠. 레이븐 스스로도 그저 전쟁 모델들이라고 작품 제목을 붙여놨을 뿐입니다. 내가 보기에 레이븐은 시스템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거나, 포괄하려는 욕심은 없어보입니다.

    여기서 위의 그 기술자가 얘기할법한 그 `표현`을 바꿔 말하면, `상징` 이 될수 있겠죠. 비행기 시스템을 상징하는 것 같다 라고 한다면, 말이 됩니다. 레이븐도 그저 양상일 뿐이에요. 전쟁도구가 장난감이 되고 장난감이 전쟁도구인, 바로 그 양상말입니다. 체계적으로 접근하였다고 하는데 레이븐이 이라크전 모든 전쟁도구들을 나타내었나요? 한낱 비행기 본체들입니다. 그것도 웹상에서는 일단 30장도 못넘네요. 이걸 시스템이라고 해야하나요? 아니면 시스템의 상징이나 양상이라고 해야하나요? 이를 가지고 김규식 작가와의 다른점으로 시스템을 얘기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 아닐런지요?

    - 만약 레이븐이 정말 모든 비행기의 부품들, 아니, 50퍼센트 만이라도 보여지게 편집해놓았다면 김현호 님의 주장, 선생님의 주장, 정말 수긍할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아니라고 보여져요. 또한 단지 김규식의 사진은 눈앞에 확 다가오는 명징한 양상이 있다고도 얘기하셨는데, 이는 제 글의 위 (1) 번에서 언급한 오류와 연관이 됩니다. 선생님 혹시 윌리엄 레이븐의 사진이 소형 프린터로 뽑아낸 11*14R 사진으로 추측을 하셨나요. 모르긴 몰라도 37*42 가 두장이 붙어있는 윌리엄 레이븐의 사진은 김규식 작가의 그것보다 훨 동공을 찔르고도 남을겁니다. 윌리엄 레이븐도 바로 앞에서보면 징그러울 겁니다. 똑같이요. 그래서 그렇게 만든 것일거구요. 아트선재에 걸린 고가의 작품이랑 모니터에서 보여지는 레이븐의 이미지 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긴 어렵다는 말 다시한번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선생님, 정말 레이븐의 오리지널 대형 프린트앞에서는, 김규식 작가에게서`만` 느껴지는 어린시절 기계에 대한 꿈에 대한 기묘한 재해석의 맛이 없다고 단정하실수 있으세요? 그동안 제가 선생님의 대부분 글줄과 서적을 읽으면서 확신한바, 선생님은 분명 레이븐의 대형 프린트 앞에서 정확히 4분정도 이상은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감상하실수 있을 거 같아요.^^;; 레이븐이 조립된 장난감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전쟁에 대한 블랙 코미디 장르라고 볼수 있다고 봐요. 블랙 코미디. 그죠? 김규식 작가도 마찬가지의 화법이구요.

    웹상의 이미지로만 보면, (두개의 오리지널 프린트를 동시에 놓고 여기서 얘기할수는 없으니까), 절대로 선생님의 다름에 대한 설명들이 먹히질 않습니다. 윌리엄 레이븐의 이미지만 봐도,  어릴적 기묘한 꿈의 재해석으로 충분히 보여질수있고, 김규식 작가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지금 글 보시는 모든 분들 내가 틀렸나요? 내가 틀렸다면 지적 바랍니다. 충분히 그렇게 볼 여지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볼 수 도있다고 얘기하는 것이고, 그렇게 얘기하지 말라고 얘기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안드로메다의 신도 그럴순 없구요. 또한 하나 더 덧붙여, 레이븐의 사진은 전쟁의 회로도와 같다고 하셨어요. 그럼 김규식작가의 그것과는 어디가 `크게` 달라서 전쟁의 회로도와 같다는... `서로 다름` 에 대한 근거를 붙인건지 궁금해요.

    http://a39c2.files.wordpress.com/2008/11/071.jpg

    적어도 웹상에서 볼때 느껴지는 전쟁에 대한 회로도의 느낌, 자본의 싸움, 개입, 인간문명의 이기에 대한 회의와 위트 같은 것은 김규식 작가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김규식 작가도 조립되지 않은 회로의 느낌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고요. 레이븐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져요. 단지 레이븐은 부품수나, 조립되어지는 비행기의 모형들이 조금 더 많을 뿐이구요. 조금 더 정교해보이구요.

    * 김규식 작가의 작품을 너무 한쪽으로 몰고가는 성향의 발언들이 강합니다. 그렇게 되면 작품이 숨을 쉴수가 없어요.

    -> 분명한 건,
    아트선재에서의 김규식의 작품과 선생님 방안에 있는 엘지모니터안의 레이븐의 이미지의 `존재양상` 이 서로 다른 것만은 확실한 거 같아요.

    3. 피사체가 다르다...

    선생님, 둘다 같은 전쟁도구들이고 전쟁 기계들입니다. 기종과 단지 기계 명이 다르다고 해서 피사체가 다른게 아닙니다. 선생님 논리대로라면, 그럼 서태지가 컴백홈 만들때 은근슬쩍 차용한 사이프러스 힐의 노래는 완전히 별개의 것, 서로 연관이 없는겁니다. 왜냐구요? 둘은 `완전히` 똑같은 얘기는 안하고 있거든요. 할말이 없어지는겁니다. (인터넷 되시는분들은 검색을 해서 들어보세요.)

    두 작가의 전쟁 기계 기종이나 부품들이 서로 다른 범위에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이를 두고 피사체 자체가 달라서 서로 다르다라고 얘기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분명히 같은 놈의 것, 같은 이름의 것은 아니지만, 같은 성질의 것, 같은 분류의 것입니다. 또 중요하게 지적해야될 지점은 윌리엄 레이븐과 김규식 작가가 담고 있는 대상물 ( 전쟁도구) 들이 어떻게 놓여져 있는가입니다. 그 놓여짐도 피사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두 작가의 전쟁도구들의 편집 방법을 보세요. 전쟁도구들을 장난감화 시켰다는 점은 완전히 같습니다. 이건 대단히 위트가 있는 편집인데요. 대상물들이 놓여져있는 방법이 아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부분과 쪼금 더 큰 부분을 보여주는 점은 다릅니다.하지만 이를 두고 `존재양상이 다르다`, `피사체가 다르다` 고까지 결단을 내릴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
    p.s : 표절이야 예술활동 혹은 대중가요건 여기저기건 많이 있습니다. 많구요.잘하건 못하건, 선생님 말씀대로,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이니, 겹칠수도 있어요.작품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정처없이 부유하는 이미지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한편으론, 표절이다 아닌것같다는 누구나 쉽게 떠들어 댈수 있는 한심한 가쉽거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한심한 가쉽거리에 대해 어느 누구도, 표절이 아니고, 불명예도 줄수없으니 당장들 멈추시오. 라고 체포할수는 더더욱 없는 법이죠.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오히려 불만 붙였으니... 그리고 그런 가쉽거리는, <작품딱지붙은 놈> 들의 감상 소감 중 작은 부분들입니다. 아주 서민적인 감상 소감입죠.^^ 그런 서민적이면서도 한심한 가쉽논란을 정말 겁줄수 있거나, 맥을 못추게 하는건, 이런 긴글들이 아니라, 누가 보기에도 당연한 몇줄의 이야기들일 뿐이에요. 정말 똑똑하면, 그런 몇줄의 이야기만 가지고 변론하겠죠. 진짜로 당당하거나, 혹은 가짜로 당당한 척 해야하니까... 다들 순진하셔서... 나도...

     

     

    작성자 : 관람객 2009.01.17
    <이영준 선생님께 질문입니다.>

    선생님 답변 잘 보았습니다. 동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아리송한 부분들이 눈에 띄네요. 잠깐, 사족을 덧붙이고 짧은 질문 하나만 우선 드릴게요.

    -------------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나요.. 하지만 그 팔이 안으로 굽는건지 앞으로 굽는건지, 동쪽으로 굽는건지는 지켜보는 사람들이 알겠죠. 선생님의 한국 사진계에 대한 사랑은 저 스스로도 무한하다고 생각합니다. 애증이죠. 가끔 선생님의 글줄을 읽다보면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과하다고 생각될 때도 잇는데요. 이번이 그런 경우에요.

    선생님, 저같은 경우는 이번이 굉장히 건전한 논란거리라고 생각이 되요. 선생님이 맨 처음 원문에 남기신 것처럼 고압적인 자세로, 하지마라 이건 아니다 라고 얘기할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니에요. 충분히 의심이 갈수있고 물어볼수 있어요. 그것도 관객의 자유이구요. 계속 이야기 나눠봐야 합니다.

    당사자 작가 본인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사진판에 있는 작가들 모두 일종의 경각심을 가지게 될수 있는 논쟁거리에요. 처음 문제제기한 분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작년에 사진 전시판에서 일종의 비슷한 경우가 있었어요. 그때에는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죠. 누군가 해주길 바랬어요. 그리고 그것이 표절이든 아니든, 그냥 쉬쉬하면서 지나갔죠.

    작품 발표할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작가들도 끊임없이 더욱 더 공부하고 알아봐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려주길 바랬죠. 선생님같은 유명한 제도권 사진과 교수님들만 할수 있는일이 아니라, 관객들이 해야할 일이기도 합니다. 윌리엄 레이븐이 유명하지 않다고 해도, 국내 블로그에서도 확인할수있고, 학부나 대학원 교수님들이라면 쉽게 알려줄수 있는 범주의 작가라고 생각이되요. 요즘 사진작가님들은 다들 대학원이나, 유학 다녀오시지 않았나요?

    그리고 선생님은 예술사진 싫어하시지만... 나에겐 사진은 그저 재밌는 대중예술 중 하나입니다. 저에겐 조덕배나,조동진님과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들이 별 차이가 없어요. 좋은 영화들도 그렇고요. 고배율 아빠백통으로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일반인들이 쉽게 즐기고, 이야기나눠볼수 있는 재밌고 즐거운 예술입니다. 약간의 지식과 노력만 투자하면 더 재밌어지구요. 김규식이나 레이븐도 이런 일반인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보여주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의 내용은 조금 골치아프고 심각한 문제이긴 하지만요.

    -------------

    anyway, 선생님의 답글에 대해 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짧은 질문입니다.선생님의 원문에 대한 제 답글 마지막 <3. 피사체에 대한 부분> 중에 있던 내용이에요.제가 중요하게 지적해야될 지점은 윌리엄 레이븐과 김규식 작가가 담고 있는 대상물 ( 전쟁도구) 들이 어떻게 놓여져 있는가입니다. 그 놓여짐도 피사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두 작가의 전쟁도구들의 편집 방법을 보세요. 전쟁도구들을 장난감화 시켰다는 점은 완전히 같습니다. 이건 대단히 위트가 있는 편집인데요. 대상물들이 놓여져있는 방법이 아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 이 점을 저는 영화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흔히 알수 있는 용어인 `블랙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우 심각한 인간 문명 이기의 탄생물들이 한낱 아이들 장난감 부품으로 둔갑을 시켜놓고 관객들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전쟁 도구들을 가지고 조립장난감 부품화 시켰다는 점에서 두 작가가 동일하게 일치한다는 점은 저와같은 생각을 하시나요? 묻고싶습니다. 위에 있는 제 글에 대한 선생님의 답글에서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으셔서요. 논란의 핵심은 이 쯤 어딘가에서부터 출발하는것같구요. 선생님이 조금 논점을 흐리셨는데... 단순히 하나가 똑같나? 두개가 똑같나? 의 문제가 아닙니다. 답변 듣고 관련하여 얘기 나눠보도록 할게요.


    출처: iPhos webzine 01 (http://webzine.iphos.co.kr)

    *iPhos webzine 자유게시판의 글을 형식에 맞게 편집한 글입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