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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트모더니즘의 벽 없는 미술관 - 로잘린드 E. 크라우스
    Archive/논문과 기사 2011. 9. 21. 10:43
    이 글은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벽 없는 미술관」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영문을 단순히 우리말로 옮기기 보다는 그녀의 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풀어쓰는 것에 목적이 있다. 또한 잘못된 번역과 이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미리 용서를 구하며, 이에 대한 지적은 언제나 환영함을 밝혀둔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E. Krauss)는 이 글에서 「벽 없는 미술관」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의 「상상의 미술관」(musée imaginaire)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녀는 물리적 실체와 증거를 중시하는 앵글로-색슨족의 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말로의 글을 자의적으로 번역하였음을 비판하면서, 이로 인해 말로가 주장하고자 했던 개념의 기반 또한 흔들어 놓고 말았음을 지적한다. 말로가 말하는 미술관은 원래 인간 능력의 개념적 공간, 말하자면 상상력, 인지력, 판단의 공간을 지칭하였다. 반면 「벽 없는 미술관」이라는 시각적 의미를 내포하는 영문 제목은 미술관을 우리가 걸어다닐 수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 그 개념을 변화시켜 버렸다.

    크라우스는 말로가 미술관을 건축적인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글에서는 오직 실제 갤러리에 대한 두 개의 이미지만을 볼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 두 개의 이미지는 물리적인 측면에서 고려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역사적으로 예술이 이해되는 방식, 가치 평가되는 방식, 체계화되는 방식의 패러다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David Teniers (1610-90) Archduke Leopold Wilhelm in his Picture Gallery in Brussels, c. 1651. Oil on copper, 105 x 130 cm. Museo Nacional del Prado, Madrid



    첫 번째 이미지는 테니르스(Teniers)에 의해 묘사된 17세기의 갤러리 장면이다. 그녀는 말로가 이 그림에서 19세기에 등장한 미술관이 기반으로 할 취향의 기준을 살펴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매체와 심미적 규범이다. 유화는 표현을 위한 대표적 매체로 여겨지며, 이탈리아식 고전주의가 바로 재현의 심미적 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의 한 전시실을 촬영한 사진이다. 여기서는 엄청나게 많은 그림들로 뒤덮인 테니르스의 그림과는 달리 엘 그레코(El Greco)의 그림 세 점만이 걸려 있을 뿐이다. 말로는 이를 통해 새롭게 부과된 질서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새롭게 만들어진 미술관의 전시실은 이제 엘 그레코의 그림이 조르주 드라 투르(Georges de la Tour)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그림과 나란히 걸리면서 하나의 콜렉션을 이루는 공간이 된다. 이는 미술관 스스로가 초래하기 시작한 가치의 재정립으로 인한 것이었다.

    크라우스는 말로가 이러한 두 종류의 전시 공간을 제시한 이유가 물리적이거나 건축적인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음을 밝힌다. 즉 이 두 공간은 전시 공간의 개념적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말로의 글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에게 있어 제도로서의 미술관은 이제 고전주의를 중심으로 한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진원지로부터 발생한 예술적 산물을 분류하고 나열하는 공간이 되었다. 다시 말해 테니르스에 의해 묘사된 전시공간은 고전주의를 예술의 중심으로 상정하고 나머지는 주변화시킨 예이며,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과 예술사가들에 의해 중립화된 공간 속에서 각각의 예술이 분류되고 비교되는 공간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말로에게 있어 이제 예술은 다양한 의미의 장(field)에 의거하여 분류되게 되었고, 분류된 각각의 예술은 저마다의 중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고전주의와 바로크, 남과 북, 선과 색 등 다양한 언어의 모델 내에서 예술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이러한 "이러한 언어적 분파들은 이제 '스타일'이라는 말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또한 크라우스는 말로가 제시하는 미술관의 형식이 르네상스 시대의 왕궁의 양식으로 부터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특히 그녀는 다시 한 번 말로의 주장에서 건축적인 논의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음을 강조한다. 제도화된 미술관을 상징하는 특정 건물은 세계의 거대한 미술관들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표일 뿐 그것의 건축적 특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왕궁은 방과 방을 병렬적으로 연결하는 '앙필라드'(en filade) 형식을 보인다. 각 방은 나름대로의 스타일로 특정한 대상들이 놓이게 된다. 말하자면 개별 방들은 일종의 독립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방은 연속선상에서 볼 때 하나의 네러티브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새로운 미술관은 바로 이러한 특성을 흡수한 것으로 미술관의 개별 방들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된 전시물로 채워지지만 동선에 따른 전체 방의 흐름은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되었다. 즉, 관람객은 일종의 '예술사'를 미술관으로부터 경험하게 된다.

    20세기의 미술관들이 위와 같은 공간적 개념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지만 크라우스는 말로 당시에 나타난 두 가지 새로운 모델에 주목한다. 모더니즘 시기의 미술관에 대한 조건들을 재기술 하려는 이러한 모델들은 말로의 저서를 이루는 추동력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바로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로 대표되는 "보편적 공간"으로서의 모델이며, 또 다른 하나는 르 꼬르뷔제(Le Corbusier)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로 대표되는 "나선형 램프" 모델이다.

    보편적 공간 모델은 환원적이고 생략적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육중하면서도 실내는 중립성을 띤다. 모듈 방식의 지붕 구조는 매우 가벼우며 수직 구조물을 최소화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한한 면적의 확장 또한 가능하다. 무엇보다 기둥이 적은 실내의 넓은 중립적 공간은 의도에 따라 파티션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공간에 설치되는 개별 사물들은 가변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무엇보다 수집된 다양한 사물들은 그것들을 관통하는 개념을 경험하도록 하며, 그러한 집합적 언어의 개념은 바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크라우스는 말로의 글의 개념이 사실상 "모더니즘"을 기술하는 또다른 방식이라고 말한다. 즉 현대미술이 세워진 기반 위에 존재하는 미학적 개념을 새롭게 코드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알려진 바와 같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으며, 말로는 19세기의 제도적 발명품이라 할 수 있는 미술관은 바로 이러한 모더니즘의 개념을 수집된 모든 회화 작품들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의 준거는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술관에 수집되어 전시되는 작품이나 사물들은 저마다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개별적인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재조직 과정을 거쳐 분류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미술관 내에서 개별 작품은 (크라우스의 말을 빌리자면) 자체적 특수성으로부터 탈문맥화의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 때 첫 번째 탈문맥화는 작품이 원래의 장소로 부터 떨어져 나와 미술관으로 전이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책이나 엽서, 포스터 따위의 복제물로 전이되는 것이다. 재현적인 목적이든 주술적인 목적이든 개별 작품은 본래적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과 목적은 그것들이 미술관으로, 다시 복제물의 형태로 옮겨지는 과정을 통해 제거되게 된다. 말 그대로 이제 그것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어 버린다. 이에 대해 크라우스는 말로의 말을 옮기고 있는데,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의 말을 주목해보자. "그것은 형상들이 복제를 통해 자신의 사물로서의 근본적 의미와 (종교적이거나 혹은 다른 어떤) 기능을 잃는 것과 같다. 즉 우리는 그것들을 예술 작품들로 바라보며, 그것들은 자신을 만들어낸 작가(생산자)의 재능만을 우리에게 호소할 뿐이다."

    이제 나선형 램프 모델을 살펴보자. 구겐하임의 나선형 램프 구조는 단지 기존의 미술관이 취했던 수평적 동선을 확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장 윗층의 시작점으로 부터 가장 아래의 도착점 까지 자연스럽게 동선이 결정되는 이러한 구조에서 순차적 경험이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보인다. 순차적 관람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구조는 기존의 미술관 동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나선형 구조에서 관람객은 미술관의 한 가운데에서 손쉽게 그 시작점과 종료 지점을 인지하게 된다. 크라우스는 이러한 방식의 동선 표현을 예술에 대한 또 다른 모더니즘적 코드 전환으로 본다. 나선형 램프 구조는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관람객의 예상된 욕구를 물리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움직임에 선행하는 인식적 노력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구조는 관람객을 미술관의 공간적 특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한다. 방과 방으로 분리되지 않은 이러한 열린 램프 구조 속에서 관람객은 자신의 상상력을 투사하게 되며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만의 새로운 보편적 예술사를 기술하게 된다. 공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관람객은 수동적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존재로 부터 벗어난다. 시작과 끝이 명확해 보이는 나선형 램프 구조는 일종의 예술적 서사의 길로 여겨지며, 이 길을 걷는 관람자는 그 서사의 주인공-주체로서 예술작품을 끌어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제 크라우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를 발견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미술관이라는 발명품은 모더니즘의 공간으로 여겨질 수 있다. 미술관에 수집된 대상물들은 예술가와 그 창조력을 보편화하는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화는 크라우스가 언급했던 '탈문맥화'에 기반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작품 (혹은 대상물)의 근본적인 맥락은 미술관 내에 전시됨으로써 제거되며, 이제 합리성과 과학성에 의거하여 보편성의 범주 안에서 그것은 예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관이 '보편적 공간'이든 '나선형 램프' 구조이든 그것은 단순한 건축적 물리적 의미가 아니라, 보편성을 향한 이러한 목적이 구현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크라우스는 바로 이 점을 명확히 하면서, 말로가 '상상의 미술관'을 관람자의 상상력과 유희가 환영 받는 열린 장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녀는 관람자 개개인의 이러한 태도가 포스터모더니즘이라고 알려진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본다. 그것은 아마도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나선형 램프 구조가 관람자와 직접적 관계를 맺는 것과 연관될 것이다. 미술관은 작품을 탈문맥화시키며 모더니즘적 공간의 성격을 가지는 동시에, 이러한 구조 속에서 관람자는 '자신만의' 인식을 토대로 저마다의 서사를 작성하게 된다. 관람자 개개인의 상상력에 따라 이해된 예술에 대한 서사는 따라서 그/녀 내에서만 보편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미술관은 단일한 보편성을 담보하지 않고, 관람자 개개인의 다양한 보편성이라는 패러독스를 산출한다. 그리고 바로 이 패러독스는 크라우스가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라 할 수 있다.

    크라우스는 피카소의 작업실에 대한 말로의 인식과 오늘날의 우리의 인식을 비교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를 읽어내고 있다. 말로는 피카소의 작업실이 낯선 작품들로 가득찬 작은 미술관 같다고 말한다. 말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양한 사물들을 통해 작품을 생산하던 피카소의 작업실을 미술관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크라우스에게 있어 말로의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모더니즘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듯하다. 크라우스는 말로가 "현대의 개인주의 미술에서는 형식들의 다양함이 우리들로 하여금 과거의 무한한 다양성을 더욱 쉽게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언급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이는 미술관에 전시되는 대상물들이 탈문맥화되고 합리성의 측면에서 보편화의 길을 걷도록 하는 모더니즘적 태도와 유사하다. 피카소의 작업실에 놓인 다양한 사물들은 원래의 문맥을 상실하고 작가에 의해 재조합됨으로써 예술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작가 개인에 의해 다루어지는 방식이다. 즉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이 강조되는 것으로 이는 말로의 피카소에 대한 모더니즘적 접근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크라우스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상황과 피카소를 연결지으며 말로의 생각과 다른 길을 걷는다. 크라우스가 보기에 현재는 "고급 예술과 대중 문화가 서로를 모방하고, 전체 미술사의 파편들 뿐만 아니라 광고와 키치적 생산물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콜라주되며, 혼성 모방이 지배적인 양식"이 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징후를 크라우스는 피카소로 부터 찾는다. 말로가 피카소의 행위를 모더니즘적인 것으로 분석한 것과 달리, 크라우스의 접근은 포스트모던적인 것으로 읽힌다. 모든 스타일에 이끌리고 그것들을 무차별적으로 합성 재생산하는 현대의 모습을 그녀는 피카소로 부터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피카소를 "혼성 모방의 대가"로 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피카소에 대한 이러한 입장 차이는 그의 행위를 작가의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것으로 보는가 아닌가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말로와 우리 세대 간의 이러한 입장 차이에 대한 전거로 크라우스는 다시 한 번 벤야민(Walter Bejamin)과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논쟁을 살펴본다. 벤야민에게 있어 현대의 넝마주이는 예술가의 상징으로 읽힌다. 두 존재 모두 주변화된 인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이러한 주장이 낭만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 넝마주이는 쓰레기마저도 교환 가치로 여기는 존재로서 자본주의적 기능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벤야민의 넝마주이는 모더니즘적 예술가를, 아도르노의 넝마주의는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부류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는 피카소에 대한 말로와 크라우스 간의 입장 차이와도 유사하다.

    이에 따라 크라우스는 넝마주이의 기능인 과거의 재활용이 오늘날 혼성모방자로서의 예술가의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헌책방이나 벼룩시장 같은 비유를 통해 말로가 생각한 상상의 미술관이 처한 현상황을 묘사한다. 시공을 초월한 사물들이 모여 예술이 되는 말로의 상상의 미술관은 이제 헌책방이나 벼룩시장 같은 공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녀는 한스 흘라인(Hans Hollein)의 압타이베르크 뮌헨글라트바흐 시립미술관(Municipal Museum Abteiberg Mönchengladbach)과 프랑크푸르트의 장식 미술관(Museum of Decorative Arts)을 통해 이러한 현상의 증거를 찾는다. 그녀는 일견 달라 보이는 이 미술관들을 지배하는 개념이 경관(vista)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미술관은 그 자체로 일종의 스펙타클로 기능하며, 기존에 비해 열린 구조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이제 벽에 걸린 작품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열린 공간에 위치한 대상물들에도 관심을 쏟게 된다. 이 속에서는 다양한 관계가 산출되며 이에 따라 관람객의 시선은 탈중심화를 경험한다. 이러한 미술관에서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너무나도 많기에 크라우스는 이러한 상황을 벼룩시장에 비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크라우스는 미술책에 대한 말로와 그녀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며 논의를 마무리 짓는다. 그녀가 볼 때 말로는 미술책을 '상상의 미술관'에 대한 모델로 생각했다. 그에게 미술책이란 형식의 가치에 대한 모더니즘적 고양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의 시대를 살았던 말로에게 미술책의 생산은 미술관 없이는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말로에게 있어 미술관은 탈문맥화를 통한 보편화의 기획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으며, 미술책은 그러한 미술관이 탈문맥화한 대상물들의 형식적 집대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라우스가 지적하듯 이러한 관계는 역전되었다. 우리 시대에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형식들 간의 교환 가능성이다. 또한 이처럼 마구 뒤섞이는 현실에서 미술관은 오히려 미술책에 의존하는 양상을 보이기까지 한다. 예술책에 대한 시장은 이제 새로운 미술관의 개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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