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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더니티와 모더니즘
    Archive/논문과 기사 2011. 9. 24. 14:53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은 같은 말일까? 다르다면 이 둘의 관계는 어떤 차이일까? 모더니즘이라는 말은 예술에서만 유효한 말인가, 아니면 근대라는 시기의 모든 사회 정치적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말인가? 무엇보다 이 두 말의 교집합은 어느 정도인가? 모더니티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정리를 살펴보자.

    모더니티
    모더니티는 일반적으로 후기 전통적인 중세 이후의 역사 시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봉건제도로부터 자본주의, 산업화, 세속화, 합리화로의 이행, 그리고 국민국가와 그것을 이루는 제도들과 감시의 형태들로의 변화로 여겨진다. 개념적으로 모더니티는 근대 및 모더니즘과 관계를 맺지만, 이는 그것들과는 구분되는 개념을 형성한다. 계몽주의가 서구 철학에 특정한 움직임을 야기한 반면, 모더니티는 오로지 자본주의의 발현과 연관된 사회적 관계들만을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 또한 모더니티는 지적 문화에 있어서의 경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세속화와 후기 산업적 삶이 한데 얽힌 운동-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 그리고 사회과학의 공식적인 수립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더니티는 문화적이며 지적인 운동들과 결합했으며 1970년과 그 이후 까지 확장되었다.


    관련 용어
    "모던"-"바로 지금"을 가리키며, 모도(modo)라는 말로 부터 파생된 모데르누스(modernus)라는 라틴어-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시기를 비기독교 시기와 구별하기 위해 5세기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벌어진 신구논쟁(quarrel of the Ancients and the Moderns)-"근대(modern) 문화가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화에 비해 우수한가?"-으로써 이는 1690년대 초반 아카데미 프랑세즈 내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다툼이었다.

    이러한 점들에서 "모더니티"는 새로운 시작을 옹호하고 역사적 기원을 재해석하면서 가까운 과거에 대한 폐기를 의미하였다. "모더니티"와 "모던" 사이의 구분은 19세기 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모터니티의 양상
    마샬 버먼의 저서 중 하나에 따르면, 모더니티는 세 시기로 구분지을 수 있다.
    (즉, 초기, 고전기, 그리고 후기로 상대적으로 나뉘어진다.)

    ● 초기 모더니티: 1500-1789 (혹은 전통적인 사료에 따라 1453-1789)
    ● 고전적 모더니티: 1789-1900 (홉스붐의 분류에 따르면 기나긴 19세게 상응함 1789-1914)
    ● 후기 모더니티: 1900-1989

    료타르나 보드리야르 같은 몇몇 저자들은 20세기 중 후반에 모더니티가 종료되었다고 믿으며, 따라서 이들은 모더니티를 뒤따르는 시기로 포스트모더니티를 정의한다. (1930년대/50년대/90년대 부터 현재) 그러나 다른 이론가들은 20세기 후반 부터 현재까지가 단지 모더니티의 또 다른 국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국면은 바우만에 의해 "유동적" 모더니티라고 불리거나 기든스에 의해 "고급" 모더니티로 불린다.

    모더니티의 정의
    정치적 정의

    정치적으로 모더니티의 초기 국면은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함께 시작한다. 마키아벨리는 만사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들에 반대하여 정치를 분석하는 중세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스타일을 공공연하게 거부하면서, 만사가 진정으로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을 선호하였다. 그는 또한 정치의 목적이 우리들 자신의 가능성과 운명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신의 섭리에 기대고 있는 그러한 가능성과 운명은 실상 재앙으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공동체 내의 폭력적 부분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러한 폭력적 부분들은 또한 입법자나 지도자들이 설명해야 하거나 심지어는 어떤 면에서 장려해야 하는 힘의 근원이 될 수도 있음을 주장했다.

    마키아벨리의 충고들은 종종 왕들이나 왕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나, 결국에는 전제군주체제에 반하는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로 나타나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차례로 프란시스 베이컨, 마차몬트 니드햄, 해링턴, 존 밀턴, 데이비드 흄,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신 마키아벨리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는 중요한 근대의 정치적 교리들은 "능숙한 정치가의 교묘한 관리에 의한 개인의 악덕은 공공의 이익으로 변모한다"는 맨더빌의 영향력 있는 주장을 포함하며, 또한 몽테스키외에 의해 명확하게 선언된 정부에 있어서 헌법에 의한 "권력의 분리"의 교리도 포함한다. 이러한 두 가지 원칙 모두는 대부분의 근대 민주주의의 헌법에 들어가 있다. 마키아벨리의 리얼리즘은 전쟁과 정치적 폭력의 가치를 보고 있지만, 그의 지속적인 영향은 "길들여"졌다. 그리하여 유용한 분쟁은 자유롭고 개인적인 사업가들 사이에서 권장되어 형식화된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분쟁"으로 최대한 의도적으로 전환되었다.

    토마스 홉스와 함께 여러 새로운 근대 과학들의 방법론의 사용이 시도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베이컨과 데카르트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인류와 정치에 적용되었다. 방법론적인 접근법의 개선을 위한 홉스의 괄목할만한 시도들은 로크, 스피노자, 지암바티스타 비코, 그리고 루소 등을 포함한다. 데이비드 흄은 홉스의 접근법의 몇몇 요소들을 거부하면서 베이컨의 과학적 방법론을 정치적 주제에 적용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 최초로 적합한 시도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적 공화주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09), 영국전쟁, 미국독립혁명, 그리고 프랑스대혁명 기간 동안 공공연하게 공화정의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근대의 정치적 생각의 두 번째 국면은 루소와 함께 시작한다. 그는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사회성에 의문을 던졌으며, 인간성이야말로 기존에 생각된 것보다 훨씬 더 융통성 있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좋은 정치적 시스템 혹은 선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란 역사에 걸쳐 전체 인류가 걸었던 우연의 길에 완전히 의존한다. 이러한 생각은 임마누엘 칸트, 에드먼트 버크와 다른 이들의 정치적 (그리고 심미적) 사고에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야기했다. 보수주의 진영에서 버크는 이러한 이해가 급격한 변화를 조심하고 피할 수 있도록 촉진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다 야심찬 운동들 또한 인간 문화에 대한 통찰로부터 개발되었는데, 이는 낭만주의와 역사주의를 시작으로 결국에는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프랑스대혁명에 영향을 받은 국가주의의 근대적인 형태들로 나타났다. 또한 한 가지 가장 극단적인 것으로는 독일의 나치 운동이 있다.


    사회학적 정의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모더니티"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부터 일어났는데, 이러한 모더니티라는 말은 가장 일반적으로 사회적 환경, 과정,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가 야기한 담론들을 가리켰다. 가장 기본적인 용어들에 있어 앤소니 기든스는 모더니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근대 사회 혹은 산업적 문명화를 위한 약호적 용어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1)세계에 대한 일련의 확실한 태도, 말하자면 인간의 개입에 의한 변형에 열려있는 세계라는 생각과 관련을 맺는다. (2)또한 그것은 특히 산업 생산물과 시장 경제라는 복잡한 경제 제도들과 관련이 있다. (3)마지막으로 근대 국민국가와 대중 민주주의를 포함한 일련의 정치적 제도들과도 관련을 맺는다. 이러한 특징들의 결과를 대략적으로 살펴볼 때, 모더니티는 기존의 어떠한 사회적 질서보다도 무척이나 역동적이다. 기술적으로 말해 모너티니 사회란 제도들의 복함물이며, 이는 다른 어떤 선행 문화와도 다르게 과거에 나타나기 보다는 미래에 나타난다.


    모더니티는 "인간을 무지와 비이성으로 부터 자유롭게 한다고 약속하는 진보적 힘"들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적 철학적 조건들과 더불어 새로운 궁극적인 도전들이 일어났다. 모더니티의 시기는 산업화와 노동의 분화에 의하여 사회적으로 특징지워진다. 또한 철학적으로는 "확실성의 상실과 결코 그 확실성이란 확립될 수 없다는 인식"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이러한 확실성의 상실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종교의 상실을 말한다. 다양한 19세기의 지성인들-어귀스트 콩테에서 칼 마르크르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은 세속화의 결과로서 사회적이고(이거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들의 제공을 시도하였다. 모더니티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로 묘사될 수 있다.

    칼 마르크스에게 있어, 모더니티의 기초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혁명의 발현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생산력과 세계 시장의 창조라는 전례하지 않았던 확장을 야기시켰다. 뒤르켐은 산업 체계에 대한 생시몽의 생각을 따라 다른 관점에서 모더니티를 비판하였다. 중세 사회라는 크스와 같은 지점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르켐은 새로운 혁명적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의 성장을 덜 강조했으며, 여기에 내포된 새로운 생산 방식으로서의 자본주의를 거의 가리키지 않았다. 모더니티의 궁극적인 추동력은 오히려 새로운 과학적 동인들과 관련된 산업주의로 여겨졌다. 막스 베버의 작업에서 모더니티는 이성화와 세계에 대한 미몽에서의 깨어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지그문트 바우만과 같은 이론가들은 모더니티가 계몽주의의 중심 교리들로부터 출발했음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은 모더니티가 물신 숭배나 홀로코스트 같은 극악한 소외의 과정들을 향해 있음을 지적한다. 현대의 비평 이론은 베버가 애초에 정의했던 것에 비해 심지어 보다 부정적인 용어로 “합리화”의 개념을 제시한다. 베버는 이를 진보를 위한 진보로 보았는데, 합리화의 과정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 근대 사회에 부정적이고 비인간적인 영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의 세계화, 문명화에 대한 비교 분석, 그리고 “대안적 모더니티”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견해와 관련한 논쟁들의 결과로, 아이젠슈타트는 “복수의 모더니티”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복수의 조건”으로서의 모더니티는 이러한 사회적 접근과 관점의 중심 개념인데, 이는 서구 유럽 문화를 배타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부터 세계적 정의에 이르기까지 “모더니티”의 정의를 확장시킨다. 이에 따라 “모더니티는 서구화되지 않으며, 그것의 핵심적 과정들과 역학 관계는 모든 사회로부터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과학적 정의
    16세기와 17세기에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와 다른 이들은 다양한 만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물리학과 천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개발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인류의 집이라 할 수 있는 지구가 더 이상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다. 케플러는 수학을 이용하여 물리학을 논의하고 이런 방식으로 자연의 질서를 설명하였다. 갈릴레오는 수학을 이용하여 자유낙하에 있어서의 등가속도에 대한 유명한 증명을 실제로 이룩하였다.

    프랜시스 베이컨—특히 그의 『신기관』(Novum Organum)에서—은 과학에 있어 실험을 바탕으로 한 접근법을 주장했다. 이는 공식적이거나 확정적 원인들에 대한 지식을 찾지 않았으며, 따라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고대 철학과 유사한 유물론이었다. 그러나 그는 과학이 인류를 위하여 자연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제도 첨가하였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이해를 위한 이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들은 그가 일찍이 마키아벨리의 중세 스콜라 철학에 대한 비평과, 지도자들은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는 제안에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갈릴레오의 새로운 물리학과 베이컨의 영향을 받은 르네 데카르트는 곧 이어 과학적 지식이 작은 단계에서 어떻게 세워질 수 있는지에 대한 모델을 수학과 기하학이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공공연하게 인간 자신은 복잡한 기계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이작 뉴턴은 테카르트에게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베이컨처럼 실험에 대한 지지에도 영향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데카르트식의 수학, 기하학, 그리고 이론적 연역이 어떠한지에 대한 전형적인 예와 베이컨 식의 실험적 관찰과 귀납법을 동시에 제공하였다. 이 모두는 자연의 질서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에 커다란 진보를 이끌었다.


    예술적 정의
    프랑스에서 근대적인 정치적 사고가 이미 널리 보편화된 이후, 루소의 인간성에 대한 재고찰은 이성 자체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비평을 야기했으며, 뒤이어 특히 예술이라는 덜 이성적 인간 행위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야기하였다. 최초의 영향은 18세기와 19세기에 독일 관념주의와 낭만주의로 알려진 운동들에 있었다. 근대(현대) 예술이란 따라서 모더니티의 후기 국면에만 속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술사는 “모더니티”라는 용어를 근대와 모더니즘이라는 용어와 지속적으로 구분 짓는다. 즉 “혁신에 대한 표면상의 절대적인 필요성이 삶, 일, 그리고 사상의 주된 사실이 된 것들 중 문화적 조건들에만 적용된” 분리된 “용어”로서 말이다. 또한 예술에 있어서의 모더니티는 “단지 근대적 존재의 상태나 신구 사이의 대립 이상이다.”

     “근대적 삶의 화가”라는 에세이에서 샤를 보들레르는 문학적인 정의를 제공한다. “모더니티에 의해 나는 일시적인, 덧없는, 불확정적인 것을 의미한다.”

    예술적 기술과 생산 도구에 영향을 미치는 발전하는 기술적 혁명은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예술과 그것의 지위의 가능성을 급속도로 변화시켰다. 사진은 화가와 회화의 지위에 도전했으며, 건축은 구조를 위한 철강의 가능성으로 변환되었다.

    정의된 모더니티
    사회학에서 가능한 모더니티의 개념적 정의는 “’증거’에 대한 강박”, 시각 문화와 개인적 가시성에 대한 강박에 의해 “표현되고 정의된다.” 일반적으로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대규모의 사회적 통합은 다음과 연관된다.

    ● 과거에는 분리되었던 인구 중에서 재화, 자본, 사람과 정보의 증가된 이동과 지역 영역을 넘는 필연적 영향
    ● 유동적인 인구의 형식적인 사회 기관의 증가, 이들과 이들의 영향이 이동하는 것 위의 “회로들"의 개발, 그리고 사회경제적 유동성에 이바지하는 사회의 표준화
    ● 사회의 부분들의 특성화의 증가, 가령 노동 분야와 지역의 상호의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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