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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티클5월]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 김신일 개인전
    Viumgraphy writes/전시 리뷰 2012. 5. 29. 21:39

     

     

     

    인간은 깨어있는 동안 늘 무엇인가를 본다. 그러나 무엇을 보는지, 더 나아가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스스로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는 행위를 그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인간 활동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김신일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태도에 제동을 건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보는 행위, 즉 “시각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육체와 사회 권력의 작동에 대한 문제”[각주:1]인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그는 이성에 의한 범주화가 오늘날 인간의 시각 활동을 규정짓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것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작업들이 어떻게 그러한 비판을 시각화함과 동시에 그것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김신일은 문자 조각을 통해 언어의 선형성을 해체한다. 그것이 인간의 보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탓이다.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도 지적했듯 문자는 “그림의 구성요소를 표면으로부터 찢어내서, 그것을 선형의 행으로 배열”[각주:2]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인간이 본 것을 직선의 형태로 추상화한다는 점에서 시각과 연결된다. 이러한 언어의 선형성이 그의 문자 조각에서 부정되는 방식은 간단하다. 문자를 나열하되 그것들 사이의 간격을 지워버림으로써 그것이 어떤 단어 혹은 문장을 구성하는지 쉽게 추적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결국 선형성이 지워진 자리에 남는 것은 하나의 오브제일 뿐이며, 이는 언어라는 선형으로 간단히 추상화될 수 없는 시각의 본질을 의미한다.


    그가 언어를 문제 삼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범주화의 도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얼굴이라는 말은 너와 나의 생김새가 지닌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언어는 개별 대상의 차이를 지우고 그것들을 하나의 말로 가두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모든 현상은 기호학(sémiologie)에서 말하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라는 이항적 관계로 환원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이항성이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가령 성(性)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갈등의 원인은 인간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항성으로 범주화하는 언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신일의 문자 조각은 언어를 통한 범주화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는 태도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범주화의 영역에서 좀 더 자유로워 질 때 평화가 생기는 것이라면 내가 지향하는 예술은, 범주화의 경계를 흔듦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궁극적으로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작가의 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절대적 봄’으로 나아가기 위해 ‘공’(空)의 개념을 형상화 한다. 그는 먼저 <Absolute Seeing>(절대적 봄)에서 중국 한나라 때의 도장 제작에 사용된 전각서체인 한인체를 응용하여 언어의 선형성을 소멸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조형물을 향해 그는 비디오카메라를 목에 건 채로 녹화한 장면을 영사한다. 촬영자가 주체적으로 바라본 결과물이 아니기도 하지만, 조형물에 가로막힌 영상 이미지 또한 빛의 조각들로 해체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작품은 언어와 이미지가 소멸되는 양상을 통해 ‘공’(空)의 개념을 도입한다. 주의할 것은 공이라는 개념이 단지 멈추어 있거나 무(無)인 상태, 혹은 부재(不在)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생성하는 잠재성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각주:3]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공의 개념을 통해 고정시키고 환원하며, 범주화하는 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의 상태로 향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작업은 공이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색’(色)이라는 개념도 동시에 형상화 한다. 그리고 이는 색의 개념이 ‘색상’이라는 의미와 ‘물질’ 혹은 ‘대상 전반’을 뜻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한다. 언어의 선형성을 소멸시키는 조형물은 그 자체로 대상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색이요, 그 조형물에 의해 영상 이미지가 다양한 색상의 유동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 또한 색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공과 색을 나눌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며,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문구인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떠올리게 한다. 즉 그는 색이 없으면 공도 없다는 선(禪)불교의 가르침 속에서 절대적 봄의 가능성을 탐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그의 메시지는 이미 ‘압인 드로잉’ 작품들에서 감지되었다. 공과 색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으며, 서로가 공존할 때만이 시각성을 획득할 수 있음을 빛(=공)과 투명한 표면에 그려진 선(=색)을 통해 제시했던 것이다.


    이처럼 김신일의 작업은 ‘무엇을 보는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범주화, 공과 색, 절대적 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념과 철학적 사유들을 끌어들인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얼핏 철학적이기만 한,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도 결국은 범주화 하는 보기로부터의 탈주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려는 시도를 위한 것이기에 그의 작업은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범주화의 극복, 그것은 곧 도처에 가득 찬 갈등의 해소를 위한 길과 하나이니 말이다.

    1. 조나단 크래리, 임동근 외 옮김, 관찰자의 기술, 문화과학사(2001), p.14 [본문으로]
    2. 빌렘 플루서, 윤종석 옮김,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커뮤니케이션북스(1999), p.6 [본문으로]
    3. 이진경, 노마디즘 1, 휴머니스트(2002), p.20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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