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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성연 - 팝콘, 모래 시리즈
    Archive/아티스트 2009. 9. 24. 04:22

    구성연, Koo Seong Youn

    1997 서울예대 사진과

    1994 동국대 학교 인도철학과

     

    구성연_팝콘_컬러인화_40×80cm_2007

     

    구성연_팝콘_컬러인화_40×80cm_2007

     

    구성연_팝콘_컬러인화_95×120cm_2007

     

    구성연_팝콘_컬러인화_120×60cm_2007

     

    구성연_팝콘_컬러인화_120×60cm_2007

     

     

     

    미의 평범성, 혹은 화사한 죽음-구성연의 ‘예술적 피사체’ 사진

    ● 달걀노른자가, 냄비에든 흰죽이, 한 공기의 쌀밥이 특별할 리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늙은 오이가, 순대가, 두부가, 팝콘이 특별한 미적 경험을 유발할 것이라 기대하는 이가 있다면, 그/녀는 매우 비범한 상상력을 지녔거나 ‘일상의 미학’ 운운하며 상품의 심미화를 조장하는 광고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들은 굳이 ‘미적’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이는 측이 속물처럼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또 굳이 사람들의 감각기관 앞에 제시해서 심미적 가치판단을 요구하기에도 어딘가 민망해 보이는, 지나치게 날 것 상태에 가까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사물들은 문화적 변용과정의 수준에서 맨 밑에 속하거나(자연 재료) 그 언저리의 것들(조리된 음식)인 것이다. ● 그래서 작가 구성연은 묘책을 쓴다. 범속한 날 것 또는 그 상태에 가까운 사물들에 작가의 ‘예술적(artistic)’ 손길을 ‘과잉되게’ 가하고, 그것을 사진이라는 매체로 이미지화 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하면 ‘속물스러울 짓’을, 말하자면 노골적으로 형식화함으로써 예술이 되게 한다. 가령 계란프라이의 노른자위 속으로 흰색 나비의 날개를 절반쯤 잠기게 한다든가, 주발에 든 밥의 표면을 푸른 유리조각들로 뒤덮는다든가, 순대에 유리 뿔을 달아줘 승천 못한 이무기로 변신시킨다든가, 팝콘 알갱이들로 매화 내지는 벚꽃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를 흉내 낸다든가. ● 이렇게 사물을 조리하는 구성연의 인위적 액션은 물론 자신의 사진예술을 위한 ‘작업’에 속하지만, 서두에 슬쩍 지나가듯이 언급한 광고인들 또한 이와 비슷하게 작업한다. 광고의 수사와 미장센과 제스처를 통과한 모든 종류의 ‘상품 화보’가 그렇듯이 구성연의 사진들은 매끈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이미지적이다. 사물/사태는 녹록찮은 조형적 수사에 의해 새로운 형과 질로 각색되고, 어떤 즉물적 상태도 용인치 않는 미장센에 의해 문화적으로 세련된 의미 지대로 들어서며, 시각이미지 세계의 문법적 코드를 따르는 제스처를 통해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성연의 사진이 광고사진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 작가의 ‘예술사진’을 ‘광고사진’과 결부시키는가? 이유는 구성연의 사진이 ‘자본주의 사회의 꽃’이라는 광고의 이미지가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은폐하고자 전전긍긍하는 ‘무엇’을 그와 닮음의 관계 속에서 누출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광고가 숨기고자 하는 그 ‘무엇’은 자신이 ‘광고’라는 점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실재적인 것도 생산하지 않고 오로지 잠재적 구매자의 소비욕망만을 부추기는 ‘자본의 시뮬라크르로서 이미지를 판다’는 사실을 광고는 감추고 싶어 한다. 그 소비의 욕망이 광고를 보는 이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처럼 오인(誤認)시키기 위해서. 그 숨김을 위한 테크닉으로 광고사진은 피사체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인공적 손질을 가하고, 현실이 제거된 매끈한 공간에 놓는다. 대부분의 광고사진이 상품을 배경이 제거된 단색조 평면 공간에 놓는 이유가 거기 있다. 작가가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구성연의 사진은 외적으로 이러한 광고사진과 매우 닮아있다. 그리고 기법에 있어서도 광고사진에서 피사체-상품을 다루는 테크닉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런데 구성연의 사진은 광고와는 달리, 그 이미지 자체가 시뮬라크르임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의 프레임 안에 고정된 모든 사물 · 모든 사건이 실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하이퍼리얼(보드리야르의 의미에서)’이라는 사실을 전면화한다. 구성연의 사진은 우리가 여전히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사진의 자명성, 즉 실재를 재현한다고 하는 사실을 뒤집어 사진 속에서 재현되는 실재란 결국 ‘보고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기술적으로 조성한 선택적 이미지일 뿐임을 인정한다.

     

    그녀가 이제까지 작업한 사진작품들을 일별하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피사체가 모두 반(反)자연 상태로 다듬어져, 무색무취의 공간에 놓인다는 점이다. 서두에 예를 들었던 사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가정집의 실내공간을 찍은 사진들(〈화분〉)에서도 우리가 보는 것은 리얼리티가 아니라 ‘인공적 리얼리티(artificial reality)’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짙은 녹색의 담쟁이 넝쿨이 어린아이의 침실, 잘 차려진 식탁, 전문서적이 빼곡히 들어찬 서재, 호사취미의 중산층 가정 거실 표면에 끔찍할 정도로 달라붙어 그 안락함과 풍요를 잠식하고 있는 이 〈화분〉시리즈 사진들은 한 눈에 ‘만들어진 풍경 사진’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이 ‘만들어진 풍경’이 드러내는 것이 곧 ‘하이퍼리얼’이다. ● 팝콘이 매화 또는 벚꽃처럼 피어있는(아니, 사실은 매달려 있는) 구성연의 최근 사진들은 언뜻 보면 현실의 꽃나무를 모방한 것처럼 보인다. 또 형식상 조선시대 사군자인 매난국죽(梅蘭菊竹) 중 매화도의 패러디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이 ‘팝콘-꽃’ 사진은 현실의 특정 꽃과도, 문사취미의 매화도와도 ‘상징적’ 관련성이 없다. 그녀의 ‘팝콘-꽃’ 사진에서 그 ‘꽃을 닮아 보이는 형상’은 이 글에서 그것의 지시어가 ‘매화’에서 ‘벚꽃’으로 갈팡질팡해야 할 정도로 정체 없는 것이고 현실의 어떤 사물로 규정될 수 없는 가상이다. 또 회색조의 기품 있어 보이는 배경 위로 봄날의 꿈처럼 아련하게 떠 있는 이 ‘꽃을 닮은 가상의 형상’은 시각적으로는 분명 문사의 취향을 자극할 테지만, 상징적 질서의 차원에서 사군자의 절개(切開) · 청렴(淸廉) · 청빈(淸貧) · 호방(豪放) 등등과는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팝콘 알갱이들은 평범한 섭취의 용도성에서 벗어나 미적 사물이 되어 있으나, 그 미적 사물은 자연의 어떤 꽃과도 친족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인공의 미적 사물이다. 그러나 또한 이 인공의 미적 사물은 기존 전통의 상징적 기표를 차용하면서도 그 속에 어떤 상징적 질서의 기의도 담지하고 있지 않다. 그러한 기대를 오히려 배반한다는 점에서 말의 직설적 의미에서 ‘無-의미’, ‘無-가치’의 사물이다.

     

    구성연 사진의 이러한 현상들은 보드리야르 같은 이가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하이퍼리얼’과 ‘시뮬라시옹’이라는 단어로 요약했던 바에 근접한다. 다만 다른 것은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는 이 현상들이 후기 자본주의 시대 미디어가 주도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황홀경,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부리는 마술, 광고의 마법적-물신적 환등상(Phantasmagoria)이라면, 구성연의 사진에서 그 효과는 작가의 과잉된 ‘예술적 제스처’에 의해, 눈에 뻔히 드러나는 모방과 차용의 전략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성연의 ‘팝콘-꽃’ 사진은 실재를 사라지게 하는 시뮬라크르인 것이 아니라, 그 시뮬라시옹을 누출하는 시뮬라크르이다. 이를테면 ‘팝콘-꽃’ 사진은 매화 · 벚꽃과 아무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문인화의 매화도와도 아무런 정신적 관계가 없는 순수한 가상이미지임을 표방하는 데서 더 나아간다. 그 순수한 가상이미지라는 것이 제스처에 의해, 미장센의 전략에 의해, 코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매체 이미지, 키치이미지, 상업적 이미지의 정체가 실재의 ‘화사한 죽음’임을, 그와 닮은 사진이 생중계하는 것이다. 혹은 지금 우리시대 ‘미’라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는지, 얼마나 공허한 것이 되어버렸는지 예술작품의 수준에서 토로하는 것이다. ● 미술세계가 ‘아트 마켓’이 전부인 것처럼 작동하는 투기자본의 새로운 성전(聖殿) 한국 미술 판에서 고급예술/대중문화, 미적인 것/상업적인 것, 여기서는 특히 예술사진/광고사진 사이에 처진 빗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이 빗금을 타파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혹은 어떤 작가의 작품이 그 위계의 빗금을 해체했기 때문에 ‘예술적’이라고 광고-비평한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짖고, 그렇게 비평을 가장한 광고를 유포하는 사람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권력적 · 상업적 담벼락이 바로 또 그 위계의 빗금이다. 그 빗금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예술작품은 안전하게 예술작품으로 승인받을 수 있으며, 도처에 넘쳐나는 미의 평범한 사물보다 우월적 지위에서 고가에 매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연의 사진 또한 아마도 이 빗금의 정치학 모델 중 하나에 위치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그에 대해 비평하는 이 글은 구성연 사진이 그 위치에 있지 않다고 증명해주는 알리바이 보증서 같은 것으로 읽힐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가, 이 글의 필자인 내가 포기해서도, 인정해서도 안 되는 지점이 있다. 포기해서는 안 될 지점은 예술이 정신적 · 감각적 실재라는 점이며, 인정해서는 안 될 지점은 예술에 더 이상 비판적 인식 · 비평의 담론 · 특수한 미적 경험의 추구가 무의미하다는 거간꾼들의 사이비 광고이다. 구성연 사진의 ‘예술적 피사체들’이 그러한 지점의 파수꾼들은 될 수 없겠지만, 그러한 문제적 지점을 환기시키는 촉매제일 수는 있다. 이 글이 밝혀보고자 했던 것은 시뮬라크르의 외양을 한 그 촉매의 잠재력이었다. ■ 강수미

     

     

    구성연_모래-거북_컬러인화_120×150cm_2004

     

    구성연_모래-돼지저금통_컬러인화_50×60cm_2004

     

    구성연_모래-문어_컬러인화_120×150cm_2004

     

    구성연_모래-물고기_컬러인화_120×150cm_2004

     

    구성연_모래-배낭_컬러인화_50×60cm_2004

     

    구성연_모래-뱀_컬러인화_120×150cm_2004

     

    구성연_모래-붉은 장미_컬러인화_120×150cm_2004

     

    구성연_모래-소라_컬러인화_120×150cm_2004

     

    구성연_모래-시계_컬러인화_120×150cm_2004

     

    구성연_모래-장미_컬러인화_120×150cm_2004

     

     

     

    구성연 작업의 최종 결과는 분명 사진인데, 그것을 온전한 사진으로 분류해도 좋을지 사실 내겐 확신이 없다. 그의 사진은 거두절미한 채 이미지로서 말을 걸었던 저간의 사진들과 아무래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중곡예처럼 연명하고 있는, 구성연의 우아한 모래 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만들고 앉아 있었을’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넋이 나가는 한편 미소를 짓게 된다. 실용적 차원에서 예술가라는 직업군의 공헌도가 미미하다는 건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는 느낌이 퍼뜩 드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 사진 찍는 일보다 조각하는 일에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 것 같다. ● 대관절 한순간에 헛수고가 되고 마는 시행착오를 감수하면서까지 저 아슬아슬한 형상들을 빚어 낸 까닭은 뭘까? 그의 조각들은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중환자 같다. 돌과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각들의 완강함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느낄 것이다. 저기에 ‘손대지 마시오!’ 따위의 경고문은 소용도 없다. 섬약하고 촉각적인 저 형태의 유일한 지주-수분이 증발하고 나면 손을 대든 말든 형상은 사라지고 말 테니까. 그는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져 뇌 속에 저장되었다가, 점차 희미해지고, 종국에는 소멸되고 마는 ‘기억’의 속성을 모래더미로 시각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모래 조각이 처음에 느끼게 하는 부질없음이 기억과 망각을 되풀이하는 우리 삶의 불명료함과 신비로움의 환유임을 눈치 채는 지점에서 그의 ‘헛수고’는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토록 짧은 모래 조각의 생애가 사진이라는 흔해 빠진 매체를 만나는 대목에서 진짜 재미는 시작된다. 동시에 구성연의 어이없어 보이던 행동도 완전히 복권된다. 알다시피 사진은 초상화의 적자이고, 초상화는 젊음과 권력이 영속하지 않음을 잘 아는 인간이, 그나마 ‘잘 나가는’ 현재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고안해 낸 장르다. 요컨대 변화무쌍함을 고정시키는 순간 사진의 슬픈 매력은 꽃을 피우며, 그 꽃은 피사체가 사람, 혹은 사람의 체온을 간직한 흔적일 경우에 더 크고 화려해지는 법이다. 그렇다손 쳐도 사진 속 모델이 하루아침에 이승을 뜨지 않는 이상 어제 찍은 사진에서 부재의 상실감을 느끼기란 어렵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모래 조각은 현상소에 사진을 찾으러 가기도 전에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렇듯 모래 조각의 일생은 사람의 생보다 짧고, 최후 또한 극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래 조각은 존재의 증명이자 부재의 증명인 사진의 이중성을 천하에 공개하는 데 가장 어울리는 피사체다.

     

    한편 모래 고유의 단조로운 색감이 초창기 사진의 세피아 톤과 흡사하다는 점은 순전히 우연인데, 그의 작업이 사진의 원초적 속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면 꽤 그럴 듯한 것이어서, 그게 전부 의도였노라 거짓말을 해도 좋을 성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아는 구성연은 거짓말에 서툰 사람이다. 그는 저 백일몽 같은 모래 조각을 몇 시간씩 주무르면서도 콧노래를 불렀을, 조금은 엉뚱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눈앞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모래성’에서 ‘기억’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다시 그것을 사진이라는 허망한 매체에 담아 보여 줌으로써 그 앞에 선 관객까지 허망하게 만드는, 영리하고 짓궂은 사진가이기도 하다. ■ 김승현  

     

    최근 구성연의 '사탕시리즈'를 보고 문득 그녀의 전작들이 궁금해져 알아본 바

    어쩐지 익숙하다 싶었던 사진들이 내 앞에 펼쳐진다.

    작가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이미지는 기억되어 있구나, 생각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녀의 작업은 일관되게

    무언가로 이루어진 형상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팝콘이 만들어내는 매화와

    모래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사물과 생명들은

    그 자체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들이기는 하다.

     

    그러나 음식물은 쉬이 썩어 사라지기 쉽고,

    모래 또한 바람 불면 흩어지기 쉬우니

    순간을 담아 영원으로 가져가려는 무모한 시도로써의 사진과는 퍽 잘 어울려 보인다.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으로의 사진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녀는
    '음식물은 내 작업의 주요한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음식이란 만들어내는 사람의 몸과 성격뿐만 아니라 문화적 내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소재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사물이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런 그녀의 생각이 아마도 최근의 사탕시리즈로의 작업을 시도케 한 것은 아닐까.

     

    또한 사물의 일차원적 재현이 아니라,

    사물을 통한 사물의 재현물을 사진으로 재현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그녀의 작업은

    사물 본연의 역할에 대해 곰곰히 생각할 시간을 준다.

    특히, 재현을 위해 사용된 사물들의 다양한 역할들이

    그것들이 재현하고 있는 것들 내부에서 어떻게 작동하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사물들을

    단지 그녀의 상상력이라고 단정짓지 않고,

    곰곰히 그 사물들의 역할과 정황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지...

     

    + 참고자료 및 사이트

    - http://neolook.net

    - 최연하. 「나비는 왜 팝콘나무 아래로 날아갔나, 구성연의 사물의식」,  『사진의 북쪽』, 월간사진, pp206~21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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